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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글

전환점

나는 이혜현, 소설 작가다. 주로 성인을 독자로 한 로맨스와 추리, 호러 소설을 쓴다.
최근에 집에 룸메이트를 하나 들였다. 살곳 없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고 있던 소라라는 사람이다. 집세도 내지 않고 꽤 제멋대로지만, 그 덕분에 나에게 영감을 줘서 좋은 소재를 떠올리게 된다.
손 근처에 남아있던 커피우유를 한 입 마셨다. 그가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누군가와 같이 있는건 꽤 오랫만인 것 같다고.
글을 쓰던 나의 앞머리에서 꽃 장식이 달려있는 집게모양의 핀이 힘을 잃고 책상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래, 이걸 처음 낀 날에는 그 사람과 함께였다. 타자를 치던 손도 뒤따라 힘을 잃고 움직임을 멈췄다.

_

그건, 몇 년 전이더라. 7년? 8년? 확실한건 5년은 넘게 지났다는 것이었다.
그 때, 자신은 어떤 남자와 만났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내 이름과 비슷하게 ㅎ이 들어갔다는건 기억난다. 그래, 여기서는 편하게 H라고 부르자. 
기억나는 것은 그가 지금의 자신처럼 뒤로 묶은 머리카락과 정말 희어보였던 피부를 가졌고, 나보다 조금 큰 키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런 그와의 첫만남은, 만남이라고 하기도 묘한 것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같은 반인것만 기억하고 있던 그가 쉬는시간에 글을 쓰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그 행동을 한 달동안 반복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아니, 그저 다가왔다고 해야 할까. 나의 책상 옆으로 와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나의 글에 관심이 있는 듯 한 건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궁금해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렇게 몇분이 지나고 쉬는시간 종이 울리기 직전, 그는 나의 공책을 가리켰다. 아, 글 말인가. 보여달라던가, 멋져서 칭찬하고 싶었다는 말을 하면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글을 자신이 고쳐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자신이 말해놓고 놀랐는지 허겁지겁 말을 수정했다. 너의 글 자체가 좋긴 하지만, 표현을 바꾸면 좀 더 괜찮아질 것 같다고.
그렇다. 당시 열 일곱살이었던 자신의 글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아무리 자신을 깎아내리며 노력하여도 말이다. 나 자신도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나의 글을 고쳐 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 날 흔쾌히 수락했고, 그 결과물은 더없이 완벽했다. 생각보다 인상이 깊었던 행동에 나는 그에게 직접 글을 쓰지는 않는지 물었다. 안 쓴다고 했다. 자신은 고치는것만 잘 한다고, 그래서 돈도 되지 않는 재능이라며 부모님께 혼난다며. 이해가 잘 가지 않았지만 일단 수긍했다. 
그 때 이후로 우리 둘은 소위 '친구' 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어쩌면 '협력자' 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칭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는 글을 쓴다. 그는 고쳐준다. 가끔은 책상에 마주앉아 잘 못 쓴 부분을 지적해주기도 했다. 나의 필력은 그나마 볼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갔다.  그의 서포트 능력은 더 보기 좋아진 듯 했다. 그렇게 중학교 생활과는 다른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 그는 나에게 공모전에 나가보자고 제안했다. 게시판에 가끔 보이던, 학생들만 참여할 수 있는 공모전. 그가 그 말을 꺼낸것은 아무도 없어 조용하던 복도에서였다. 게시판에 있는 기본폰트로 큰 의미없이 정보를 전달할뿐인 글자가 인쇄된 A4용지.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그에게서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허리를 숙여 공모전의 내용을 머릿속에 새기던 풍경은, 어째서인지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날 집에 와서 오랫만에 혼자서 글을 완성했다. 나는 그때, 내가 쓰는 단어의 수위가 꽤나 높아졌다는것을 깨닳았다. 공모전에 나가는 글은 전체이용가여야 할 텐데, 내가 쓰는 글은 그 위를 웃돌았다. 이러면 안 돼. 전체 이용가를 의식하며 쓰자. 그렇게 생각하자 한글자도 쓰여지지 않았다. 그가 글을 고칠 때는 늘 잔인하고 끈적한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글은 전혀 더러워지지 않았다.

그때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고쳐준 나의 글에, 그가 사용하던 단어에, 혹은 그 자체가 나에게 점점 녹아들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원래 청소년은 읽을 수 있을 정도였던 나의 글은 성인이 읽기도 힘든 수준이 되어버렸다. 

다음 날, 나는 공모전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끄덕였다. 

그렇게 평범하다고 할 수도 있는 나날들이 흘러갔다. 나는 글을 쓴다. 그는 고친다. 그러하여 시간이 갈 수록 내 글의 완성도는 높아져, 어느 순간부터 그가 글을 보고 하는 것은 오탈자를 찾아주는 것과 글에 대한 감상평을 알려주는 것 뿐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열리는 백일장 등의 글쓰기 대회에서 상을 타기 시작하였고, 그에게는 별로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더 우울해 보이는 듯 했다. 나는 이유가 그의 가정생활이 힘들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폭력적인 부모. 그에게 용돈같은걸 줄리가 없다. 제대로 된 옷 몇 벌은 커녕 식사하기도 힘든 형편.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은 학교뿐.
 
하지만 난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아니다. 한 가지 있었다. 공모전이다.
큰 공모전에는 상금이 따라온다. 그리고 자신의 실력도 증명할 수 있다.

그 이후로 나는 온 힘을 쏟아, 혼자서 공모전이란 공모전은 전부 나가며 상금을 타기 시작했다.
백일장, 청소년 공모전, 성인 공모전, 교내 공모전, 교외 공모전. 어느 공모전이든 괜찮았지만 주로 우승 상품이 풍부한 것을 골라서 했다. 물론 상품은 전부 그에게 주었다.
 
그때즈음부터 공모전 덕분인가, 몇몇 출판사에서 제대로 책을 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기 시작했다. 예전에 내가 지원을 했지만 거절당한 출판사도 있었다. 예전의 나라면 어림없었을 기회. 놓치면 아까울 것 같아 모두 수락하였다. 공모전의 글은 완전히 전체이용가라 심의등급 만 15세 이상 글을 쓰고싶다고 이야기하자 좀 놀란 사람들도 있었지만, 내 습작들을 읽고 수락한 출판사가 있기에 그들과 계약을 진행했다. 전보다 더 큰 에너지를 쏟아 글을 쓰고, 시간이 날 때마다 H의 검수를 받기 시작했다.
 
H와 함께할 때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바디랭귀지로 대부분의 소통이 가능하다.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은 필기도구 사각거리는 소리와 H의 조근조근한 말소리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도 나와 일을 할 때 가장 편안해 보였다. 평소와 같이 긴장한 듯 잔뜩 움츠리고 있는게 아니라, 몸에 힘이 풀리고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비친다. 비록 그런 순간이 영원하진 않았지만, 나는 이런 찰나가 고통의 굴레를 잠시만이라도 끊어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방과후의 교실. 노을 햇살이 교실의 더러운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앞 책상의 의자를 돌려 나를 마주보고 앉은 H. 그가 내 글을 볼펜으로 짚어가며 어디를 고쳐야 할지 말해준다. 이 풍경이 그에 대한 나의 기억 대부분을 차지한다. 어쩌면 죽기 직전, 주마등이 지나갈 때 보는 것이 이것일지도.
 
우리는 점점 더 긴 시간을 함께하게 되었다. 글을 쓰는것 이외에 함께 공원에서 석양을 바라보거나,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표정은 나와 함께할 때만 순간적으로 밝아질 뿐, 오히려 나날이 어두워져 갔다.
어느 시험을 치룬 뒤 다음날, 그는 쉬는 시간에 나에게 다가와서는,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보이며 나에게 공부하는걸 도와줄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상위권이라 할 수 있는 성적을 냈지만-그는 아쉽게도 그러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날 방과후는 과외를 하며 보냈다.
 
시험 이후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주말, 함께 언덕에서 노을을 감상하던 그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너는 사람을 죽이면 어떨까 생각해본 적 있어?"
"...실제로 경험해본다면 소설에서 더 현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겠지."
"...그렇구나."
그는 다시 노을로 시선을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 글을 쓰고있지 않을 때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그가 말을 꺼낸 것은 물론이고, 내용도 그동안 한 번도 꺼낸적 없는 주제라 의문스러웠다.
항상 야외에 있어 어두운 색의 피부. 소매를 걷어 드러난 얇은 팔, 그리고 그것을 싸매고있는 붕대. 아마 새로 살 수 없을걸 알고 받았기에 조금 큰 사이즈의 교복.
나는 아마 영원히 경험하지 못할 우울함과 허무함이 느껴져, 뒤편에 앉아 노을 햇살에 안겨진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월요일. 또다시 새로운 주의 시작.
조례시간이 끝나고 H가 나에게 다가왔다. 
"방과후에 OO아파트 주차장에서 만날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시간은 언제나와 같이 지나가고, 하교시간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그때는 봄과 여름의 경계선, 하복을 입은 학생과 춘추복을 입은 학생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나는 춘추복을 입고 왔지만, 사물함에 하복이 있어 갈아입기로 하였다.
 
교실 밖으로 발을 내뎠다.
경비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학교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 건물이 만드는 그림자가 내 몸을 감싸고, 지하로 내려가면 주변이 점점 어두워진다.
주차장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걸어간다.
저기에 그가 보인다. 
몸 이곳저곳에 있을 상처를 티셔츠와 청바지로 가리고 나온 그가 있다.
가방이나 핸드폰 하나도 들고나오지 않았다.
그는 뒤로 팔짱을 끼고 다리를 의미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심심한듯 보이지만, 그 어떤 때보다도 상쾌한 모습이다.
그가 발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든다.
 
"왔네. 여기 커피우유."
"..."
"응, 여기로 오게한건 커피우유 하나때문이 아니니까. 너도 그건 알고 있을테지."
 
나는 커피우유를 받아들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나를 향해 다가왔다. 

커피우유를 뜯어 한 입 마시고는 바닥에 내려놓았다. ⋯언제나와 같이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이 입안에 남는다.
 
"있잖아, 언젠가 이런 날이 오기를 바래왔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는거 말이야. 불가능할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허리춤에 손을 뻗었다.

“그래서 용기가 나면 언젠가 혼자 하려고 계획하고 있었지."

나는 손에 힘을 쥐었다.

“그러니까, 혜현아.”

나는 칼을 그의 급소에 찔러넣었다.

그는 앞으로 걸어와 어깨 위로 팔을 둘러 나를 안았다.

"...고마워."

닿아있는 몸에서 힘이 풀려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무언가 가벼운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게중심이 쏠려 서있기가 힘들어진다.

발치에 있던 커피우유를 발로 건드려서 살짝 쏟아버렸다.
집에서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을텐데, 발을 뗄 수 없었다.
희미한 노을빛이 발 앞에 있는 핑크색 장식이 달린 머리핀을 비춘다.
 
-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다다음날에도 H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실종신고는 이상함을 느낀 담임 선생님이 했다. 사건은 가정폭력에 시달린 학생의 자살이라고 결정지은 경찰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죽었든 살았든 보고싶지 않다고 했다.

-
 
급식 디저트로 커피우유라니, 흔하지 않은데. 보통은 딸기나 초코우유가 아닌가.
"아, 그거 알아? 어떤 커피우유에는 일반 커피보다 훨씬 많은 카페인이 들어있어서, 잠깨고싶은 사람들이 많이 마신다고 해. 다만 이건 급식이니까 함유량이 적겠지…”
...?
"몰랐다는 표정이네. 항상 에너지드링크만 마시던데 한 번 시도해보면 어때? 효과가 더 좋을지도 몰라.”

-

그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그의 머리핀을 끼고, 커피우유를 마시며 그가 완성시켜준 나의 필력으로 오늘도 글을 쓴다.
…이렇게 쓸모없이 추억에 젖어서는. 오랫만에 그를 찾아가기라도 해야겠다.
의자에서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가는걸 룸메이트가 멍하니 바라본다. 뭐, 상관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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